우리교회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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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Q&A

 

교회의 연혁이 어느 정도 되는데도 왜 교회당 건물을 얻거나 건축하지 않나요?

-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상가 한 공간을 사서 들어올 여력이 있었지만, 사실상 교회당 건물을 지을 여력은 없습니다.

본래 우리의 정신은, 나름대로 교회가 교회당 건축에 너무 많은 재정을 투자하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일에 교회의 재정과 에너지를 쓰면 우리교회에서는 재정의 일정 부분을 긍휼, 장학, 선교 분야를 위해서 지출하기로 방향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가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 편하게 여기는 환경이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조금씩 잘 자라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교우들이 변화되고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우리교회의 방향성을 보고, 교회당 건축을 하거나 자기네 교회 규모에 맞는 아담한 교회당을 가진 다른 교회들을 부정적으로 보실 일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도 용납이 안되는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여 대형 교회당을 (경쟁적으로) 짓는 경우는 달리 고민해 보아야 한다 생각합니다만....).

 

흔히 있는 여러 종류의 목적헌금이 없고 긍휼헌금만 있는데요?

- 그것은 교회에 드라이브를 걸지 않으려는 방향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운영 원칙 중 하나가 모든 사역은 자발적으로 감당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드라이브를 걸지 않으려 하니, 모든 인위적인 성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외적인 성장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교우들에게 헌금이나 충성, 헌신을 드라이브 거는 것을 별로 건강한 모습이나 태도가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는데, 이유는 무엇인가요?

- 오늘날 우리네 교회의 수평이동은 대형 교회들이 작은 교회들의 성도들을 흡수하여 자라나게 된 비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전적으로 회심한 이들만으로 대형화된 것이라면 예외겠지만,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형교회가 하나 생겨나거나 들어오면 주변의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그리로 빠져나가 심지어 교회당을 매물로 내어놓는 것도 보게 되는데, 하지만, 그런 대형교회의 지도자와 그 안의 교인들은 이렇게 자기네 교회가 다른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흡수하면서 대형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작은 교회 여럿의 문을 닫거나 교회당을 팔게 만들었다는 점을 애써 눈을 감고 자신들의 교회가 대형교회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토만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자신조차 상당수가 자기가 섬기던 작은 교회를 버리고 그곳으로 수평 이동한 이들이었음에도 말이지요.

따라서 이런 수평이동은 하나님 앞에 매우 큰 죄악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경제 윤리조차 대기업이 골목 상권을 침해하거나 문어발 경영을 하는 것을 경제 정의 차원에서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작은 교회들의 교우들이 유입되는 수평 이동을 뻔히 알면서도 용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신앙 윤리의 부족입니다.

이런 수평이동에 대하여 눈을 감고 말로만, 선언 상으로만, 설교 만으로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중적인 교회의 부패한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잘 훈련된 임직자들이 오면 교회에 분명히 큰 힘이 될 줄 알아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막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보에 헌금자 명단이 없고, 헌금통도 따로 돌리지 않는데요?

-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그것을 교회가 경쟁적으로 참여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보에 이름을 내다 보면, 교우들이 어느새 자기 이름을 살피기 되고, 또한 그 헌금한 내용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자만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보에 헌금자 명단은 없어도, 감사헌금의 내역은 이름없이 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교회에서는 감사헌금을 드릴 때에, 그 고백을 담도록 하고 있는데, 그것만큼은 아름다운 내용들이어서 그러합니다.

 

장로님들이 계신데 주일아침예배 기도 순서를 장로님들이 아닌 분들도 참여하시네요?

-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 아침예배 시간에 서리집사를 비롯한 직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경우 누구든지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예배 순서 중의 기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일 아침예배 시간의 기도를 장로님들의 전유물로 삼지 않으려 함과 동시에 그리 하니, 정말 그 기도들이 타성에 빠진 기도가 되거나 또는 기도의 내용과 달리 삶과 교회 생활의 자세가 너무나도 다른 괴리가 일어나는 일이 거의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기도의 내용들이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제직회 부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팀으로 편성되어 있던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 사회 일반에서도 이제는 수직적인 부서체계보다는 수평적인 팀 체계로 변화가 일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장-부원들 체계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문화 대신 팀장-팀원 체계로 이어지는 수평적인 팀 체계를 선택한 것입니다. 팀을 총괄하는 코지가 있지만, 그 코치도 지시를 내리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팀을 지원하고 돕는 서포터 위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팀 체제로 꾸려오니 참 좋은 점들이 많습니다. 일단 창의적인 방식들이 많이 도출되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 자기 일처럼 자발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더군요.

 

예배 순서가 전통적인 교회의 그것과 왜 다른가요?

- 전통적인 예배 순서도 우리가 집중만 할 수 있다면 그대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우들이 그냥 보는예배가 아니라 정말로 좀 더 깊이 참여하기 위한 순서들로 예배를 준비하다 보니 이러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배 순서는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를 '보는' 관습과 분위기를 벗어나서, 교우들의 참여를 더 집중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우들이 주일날 이름표를 착용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일반적으로 어느 모임이든지 새로 들어오는 분들이 상대적 약자에 속하여 여러 가지 적응하려면 불편한 입장에 있게 됩니다. 교회에 새로 들어와서 누가 누구인지, 그분들에 대한 직분상의 호칭은 어떠한지를 모르기에 여전히 불편한 것은 기존 교우들이 이름표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그(=예비 그리스도인)를 지향하는 교회로서 새로 오신 분들께 편리함을 드리려고 기존 교우들이 이름표를 차고 있습니다.

 

주일아침 예배 찬양으로 찬송가를 잘 부르지 않던데요?

-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라는 책에는 실제로 앞의 몇 십장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사실상 복음송입니다. 복음송은 그 내용과 형식으로 보나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그 믿음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라 본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목적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 내용이나 곡조에 있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찬양곡들을 골라서 예배 찬양에 쓰고 있으며, 그 중에 기존의 찬송가에서도 그에 합당한 곡들은 한 두곡씩 골라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임직식 때 어떠한 종류의 헌금이나 헌물도 받지 않는다는데요...

- 임직식 때 교회 발전 기금의 명목으로 헌금을 내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발전기금 형식의 목적헌금은 일반의 교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위적으로 또는 알아서 이루어지는 문화였기에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굳이 막지 않을 수 있었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그러지 않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그동안 장로장립식이나 안수집사, 권사 임직식에서도 한 번도 그런 헌금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직분은 하나의 자리나 직급이 아닐 뿐더러, 세상에서 진급하는 자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임직식에서 선물을 돌리고, 심지어 청첩장을 돌리는 일들도 사실 그 본디 정신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그렇게 어떠한 발전 헌금도 받지 아니하고 임직식들을 하게 되니, 제 마음에는 더욱 깨끗하고 아름다운 임직식을 임직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싶어 흡족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제 영혼이 평안하였습니다.

 

주일아침예배 본문 살피기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참여하는가요?

- 우리교회에서는 본문살피기라는 신앙생활의 실천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중 대략 목요일 즈음에 설교자가 그 주간에 전할 본문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내어서 교우들이 미리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며, 임직자들과 제자훈련생 및 주요 사역자들은 그 답안을 목회자에게 제출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시작한 지는 거의 15년이 넘었고, 그 기초적인 제안은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장로님 한 분에게서 시작되어 오늘의 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시스템이 정말 교회와 교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우리가 처음 시행하는 이들로서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우들이 주일 말씀을 미리 한 번 읽고 오게 되는 것만 하여도 말씀 위주로 사는 삶이 주중에 이어지게 되고, 또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게 됨으로 말씀에 집중하게 되며, 또한 기대를 가지고 설교 말씀을 듣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익함에 대하여서는 상단 메뉴의 <나눔마당(사역게시판>의 상단 <알림>글에 자세히 올려놓았으니, 거기서 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담임목사님이 같은 본문으로 두 번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 이것은 우리 교회를 시작하면서 제가 스스로에게 정해 두었던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원칙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본문으로 두 번 설교하는 일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하기에, 이것을 하나의 불변의 법칙처럼 적용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요.

다만 그렇게 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같은 본문으로 두 번 설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먼저는 제 자신이 목회의 마지막 여정에도 여전히 연구하는 목회자로 남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설교자로서 목회자들이 나이 들어 한 교회에서 오래 섬기다 보면, 설교나 가르침의 내용이 반복이 되어서 연구하지 못하는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저도 나이들어갈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모습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둘째, 성경의 풍요로움을 다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까워서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아무리 오래 교회에서 시무하여도 평생 성경 본문을 다 다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본문을 다 다루는 것은 고사하고 중요한 본문이라도 다 손대지 못할 듯 싶은데, 본문을 중첩하며 게다가 내용까지 비슷한 것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성서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좀 더 많은 본문을 설교하고 설교자의 삶을 마쳤으면 합니다.

셋째, 우리 교우들에게 말씀의 영양 섭취를 골고루 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강단을 보면, 전반적으로 다루는 본문들이 비슷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강단이 교우들에게 편식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식을 하면 건강치 못하게 되듯이, 믿음도 그러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저 잘 아는 본문만 다루는 것이 교우들과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균형감 있는 믿음과 영성을 위해서 성경의 양식을 더 골고루 먹이는 일이 중요하다 여겨집니다.

 

설교 말씀은 성경 본문에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 비유로 설명드리면, 왕이 다른 나라에 대사를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그 파견된 대사가 전하는 말이 왕의 뜻과 다르다면, 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사가 왕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전하는 일은 왕의 뜻을 잘못 알아들어서든 또는 의도적으로든 그것은 대사의 본문을 망각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왕과 그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위험하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설교는 왕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대신 전하는 대사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사가 된 설교자들의 선포는 정직하기도 하고 정확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의 원문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정확성이 떨어지는 설교가 적지 아니하고, 심지어 성경의 본문과는 상관없는 주제와 사람의 말들이 설교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고, 그래야 본문에 정직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서의 원어 본문이 본디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아는 일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 또한 왕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며, 본문에 정직한 설교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 자체의 능력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고,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확하고 정직한 말씀을 듣게 되는 이들이 실로 변화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